마케도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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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은 기원전 8세기 또는 7세기 초에 아르게아스 왕조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현재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지역에 위치했다.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1세 시대에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했으며, 필리포스 2세 때 군사력을 강화하여 그리스를 제패했다.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마케도니아는 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안티고노스 왕조가 마케도니아를 지배했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멸망하고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는 세습 군주제, 강력한 왕권, 다양한 정치 제도와 사회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군사 기술과 공학, 건축 분야에서도 발전을 이루었다. 마케도니아의 유산은 헬레니즘 문화의 확산과 로마 제국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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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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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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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명칭 | 마케도니아 |
로마자 표기 | Makedonía |
영어 명칭 | Macedon |
역사 | |
건국 | 기원전 7세기 경 |
건국 신화 | 카라노스 또는 페르디카스 1세에 의한 건국 |
페르시아의 속국 | 기원전 512/511년–493년 |
페르시아 제국 편입 | 기원전 492년–479년 |
마케도니아의 부상 | 기원전 359년–336년 |
코린토스 동맹 창설 | 기원전 338년–337년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 기원전 335년–323년 |
바빌론 분할 | 기원전 323년 |
디아도코이 전쟁 | 기원전 322년–275년 |
멸망 |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 |
재건 시도 | 기원전 150년–148년 |
정치 | |
정치 체제 | 세습 군주제 |
수도 | 아이게아이 (기원전 399년 이전) 펠라 (기원전 399년–168년) |
주요 지도자 | 필리포스 2세: 기원전 359년–33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원전 336년–323년 페르세우스: 마지막 왕, 기원전 179년–168년 안드리스쿠스: 반란 지도자, 기원전 149년–148년 |
지도자 칭호 | 바실레우스 |
의회 | 시네드리온 |
언어 | |
공용어 | 고대 마케도니아어 아티케 그리스어 코이네 그리스어 |
종교 | |
종교 | 그리스 다신교 헬레니즘 종교 |
경제 | |
통화 | 테트라드라크마 |
통계 | |
기원전 323년 | 면적: 5,200,000 km² |
이전 시대 | |
이전 국가 | 그리스 암흑기 |
페르시아 속령 | 아케메네스조 마케도니아 |
코린토스 동맹 | 코린토스 동맹 |
아케메네스 제국 | 아케메네스 제국 |
파우라바스 | 파우라바스 |
이후 시대 | |
이후 국가 | 리시마코스 제국 셀레우코스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아탈로스 왕조 마케도니아 속주 |
2. 어원
'마케도니아'(Μακεδονία)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단어인 마케드노스(μακεδνός)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는 보통 '높은 것', '고지 사람'을 뜻하는 말로, 아마 고대 마케도니아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06][407]
마케도니아 왕국은 기원전 8세기 또는 7세기 초 아르게아스 왕조가 통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아르게아스 왕조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 시에서 이주해 왔다고 한다.[410] 할리아크몬강과 악시오스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야에 자리잡은 마케도니아 왕국은 올륌포스 산 북쪽의 '하부 마케도니아'라고 불렸다. 알렉산드로스 1세 시대에는 상부 마케도니아와 서쪽으로 악시오스 강을 넘어 여러 트라키아 부족이 살던 에오르다이아, 보티아이아, 뮈그도니아, 알모피아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였다.[411] 페르디카스 1세 (혹은 그의 아들인 아르가이오스 1세일 가능성이 크다)는 오늘날 베리아(베로이아) 시 주변에 자신의 도읍인 아이가이(오늘날의 베르기나)를 세웠다. 다리우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 지배를 잠시 받은 뒤, 알렉산드로스 1세 때 독립을 되찾았다.[411]
이 이름은 "키가 큰, 날씬한"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형용사 μακεδνός에서 파생되었으며, 도리아인과 관련된 민족의 이름(헤로도토스)이자 아마도 고대 마케도니아인을 묘사하는 단어였을 것이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길다" 또는 "키가 크다"를 의미하는 형용사 μακρός|마크로스grc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이름은 원래 "고지대 사람들", "키가 큰 사람들" 또는 "키가 크게 자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10]
3. 역사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마케도니아 건국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의 증손자인 테메노스가 아르고스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의 자식들이 왕위 계승 다툼을 벌였다. 이때 패배한 페르디카스 1세는 형제들과 함께 상마케도니아의 레바이아 마을로 망명했지만, 흉조가 나타나 추방되었다. 페르디카스 1세는 형제들을 이끌고 방랑하다가 미다스 정원 근처에 정착, 주변 땅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왕가를 창시했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 왕가는 아르고스를 고향으로 삼았으며, 헤라클레스 혈통을 잇는 영웅의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아뮌타스 3세 때 마케도니아는 통일 왕국을 이루었으나, 해안 평야 지방과 고립된 부족들이 사는 배후지가 서로 융합되지 못했다. 이들은 일리리아에서 오랑캐들이 침공하던 산 고개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기 마케도니아는 점점 아티케화되었는데, 당시 저명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인을 야만인으로 여겼다.[413]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어의 방언을 썼으나, 남쪽 도시 국가에서 쓰는 그리스어로는 완전히 인정받지 못했는데, 마케도니아인들이 남쪽 사람들의 폴리스 문화와는 다른 사회였기 때문이었다.[412]
4세기에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 남쪽 도시 국가들의 정치에 점차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나, 고졸기의 특징을 견지하였으며, 헬라스 도시 국가보다는 뮈케나이 문화에 더 가까웠고, 필리포스 임금이 여러 아내를 둔 것처럼 고졸기의 풍습을 지녔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세습 군주제를 강하게 고집하여 왕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때때로 토지 귀족들의 견제를 받거나 종종 왕가 내부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는 남쪽 그리스 문화와 크게 대조되었다.
아뮌타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알렉산드로스 2세와 차남인 페르디카스 3세는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였다. 페르디카스 3세의 어린 후계자는 아뮌타스의 셋째 아들 필리포스 2세에 폐위당하고, 필리포스 2세는 스스로 왕이 되어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지배하는 시대를 열었다.
초기에는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지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1세는 이전의 그리스 적대국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이끄는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28] 그의 후계자 마케도니아의 페르디카스 2세는 델리안 동맹의 지도국인 아테네와 4차례의 전쟁을 치렀고, 트라키아 통치자 오드리세스 왕국의 시탈케스의 침략은 마케도니아 북동부의 영토 보전을 위협했다.[29]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2세 사후, 마케도니아의 페르디카스 3세가 즉위하여 통치 기간 동안 정치적 안정과 재정 회복을 이루었다.[55] 그러나 코논의 아들 티모테오스가 이끄는 아테네의 침공으로 메토네와 피드나를 점령당하고, 바르딜리스가 이끄는 일리리아의 침공으로 페르디카스 3세와 4,000명의 마케도니아 군인이 전투에서 사망했다.[56]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59년에 왕위에 올라, 마케도니아 군대를 개혁하고 주변국과의 외교를 통해 마케도니아를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3. 1. 초기 역사와 전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등 고전 그리스 역사가들은 전설에 따르면 아르게아드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들은 아르고스의 왕 테메노스의 후손이며, 따라서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를 그들의 조상 중 한 명이자 그리스 신화의 주신인 제우스의 가계도로 주장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13]
마케도니아의 첫 나라는 기원전 8세기 또는 기원전 7세기 초 아르게아스 왕조가 통치하면서 생겼는데, 전설에 따르면 아르게아스 왕조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 시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410]
할리아크몬강과 악시오스강이 흐르는 비옥한 충적 평야에 자리잡은 마케도니아 왕국은 올륌포스 산의 북쪽으로 '하부 마케도니아'라고 불렸다. 알렉산드로스 1세 시대에 이르러 상부 마케도니아와, 서쪽으로는 악시오스 강을 넘어 여러 트라케 부족이 살던 에오르다이아, 보티아이아, 뮈그도니아, 알모피아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였다.[411] 페르디카스 1세 (혹은 그의 아들인 아르가이오스 1세일 공산이 크다)는 오늘날 베리아(베로이아) 시 주변에 자신의 도읍인 아이가이(오늘날의 베르기나)를 세웠다. 다리우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잠시 받은 뒤, 이 나라는 알렉산드로스 1세 임금 때 독립을 되찾았다.
가장 유명한 마케도니아의 건국 신화는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증손자였던 테메노스가 아르고스의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의 자식들이 왕위 계승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이때 패배한 페르디카스 1세는 형제들과 함께 상마케도니아의 레바이아라는 마을로 망명했지만, 흉조가 나타나 다시 추방되었다. 페르디카스 1세는 형제들을 이끌고 방랑하다가 미다스의 정원 근처에 정착했다. 그곳을 거점으로 주변 땅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왕가를 창시했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왕가는 아르고스를 고향으로 삼았으며,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잇는 영웅의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3. 2. 고대 그리스와의 관계
아뮌타스 3세 때 마케도니아는 통일 왕국을 이루었으나, 해안 평야 지방과 고립된 부족들이 사는 배후지가 서로 융합되지 못했다. 이들은 일리리아에서 오랑캐들이 침공하던 산 고개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기 마케도니아는 점점 아티케화되었는데, 당시 저명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인을 야만인으로 여겼다.[413]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어의 방언을 썼으나, 남쪽 도시 국가의 많은 이들이 쓰는 그리스어로는 완전히 인정받지 못했는데, 마케도니아인들이 남쪽 사람들의 폴리스와 문화와는 다른 사회였기 때문이었다.[412]
4세기에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 남쪽 도시 국가들의 정치에 점차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나, 고졸기의 특징을 견지하였으며, 헬라스 도시 국가보다는 뮈케나이 문화에 더 가까웠고, 필리포스 임금이 여러 아내를 둔 것처럼 고졸기의 풍습을 지녔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세습 군주제를 강하게 고집하여 왕이 강력한(때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때때로 토지 귀족들의 견제를 받거나 종종 왕가 내부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군주제는 남쪽 그리스 문화와 크게 대조되었다. 그리스에서는 독자적인 도시국가들이 대개 귀족정이나 민주정 체제를 갖추었으며, 사실상 군주인 참주의 경우에도 대개 권력 세습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관습이 아니었고, 스파르타에서는 군사 지휘관과 성직자로서 두 세습 군주를 두던 것은 예외적인 사례였다. 마케도니아나 그리스 모두 봉토와 같은 봉건 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을테지만, 마케도니아에서는 봉건 제도가 역사 시대까지 계속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가 발흥하기 전부터 이러한 제도가 도시 국가에서 폐지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솔론의 세이사크테이아 법)이다.)
아뮌타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알렉산드로스 2세와 차남인 페르디카스 3세는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였다. 페르디카스 3세의 어린 후계자는 아뮌타스의 셋째 아들 필리포스 2세에 폐위당하고, 필리포스 2세는 스스로 왕이 되어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지배하는 시대를 열었다.
초기에는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지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1세는 이전의 그리스 적대국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이끄는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28] 그의 후계자 마케도니아의 페르디카스 2세는 델리안 동맹의 지도국인 아테네와 4차례의 전쟁을 치렀고, 트라키아 통치자 오드리세스 왕국의 시탈케스의 침략은 마케도니아 북동부의 영토 보전을 위협했다.[29]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마케도니아 왕국 근처의 스트리몬 강에 식민지 건설을 추진했고, 기원전 437/436년에 암피폴리스 식민 도시가 건설되어 아테네에 은과 금, 그리고 목재와 피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여 아테네 해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30] 페르디카스 2세는 처음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트라키아인들이 그들 둘 모두의 적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아테네인들을 환영했을 수도 있다.[31] 이것은 페르디카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그의 형제이자 사촌과 아테네가 동맹을 맺으면서 바뀌었다.[31] 따라서 기원전 433년과 431년 사이에 아테네와 두 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다.[31] 마케도니아 왕은 할키디케에 있는 아테네 동맹의 반란을 지원하여 보복했고, 그 후 전략적 요충지인 포티다이아를 점령했다.[32] 아테네는 마케도니아 도시 테르마와 베로에를 점령한 후 포티다이아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테르마는 시탈케스가 중재한 평화 조약에 따라 마케도니아로 반환되었고 할키디케의 많은 부분이 아테네로 반환되었으며, 시탈케스는 새로운 트라키아 동맹을 획득하는 대가로 아테네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33]
페르디카스 2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31–404년)에서 스파르타 편에 섰고, 기원전 429년 아테네는 시탈케스를 설득하여 마케도니아를 침공하도록 보복했지만, 겨울에 식량이 부족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34] 기원전 424년, 상 마케도니아의 린케스티스 지역 통치자인 아르라바에우스가 자신의 주군인 페르디카스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스파르타인들은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우려고 동의했다.[35] 린케스티스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인들은 공황에 빠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도망쳤고, 스파르타 장군 브라시다스는 분노했고 그의 병사들은 방치된 마케도니아 군수품 호송대를 약탈했다.[36] 페르디카스는 그 후 입장을 바꿔 아테네를 지원했고, 아르라바에우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37]
브라시다스는 기원전 422년에 사망했는데, 그 해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아테네 동맹으로서의 마케도니아의 의무를 면제하는 협약인 니키아스 평화를 맺었다.[38] 기원전 418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스파르타인들은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었는데, 페르디카스 2세는 할키디케에 남아 있는 스파르타 동맹의 위협을 고려하여 이 군사 조약에 참여하기를 열망했다.[39] 아르고스가 갑자기 친 아테네 민주주의로 입장을 바꾸자 아테네 해군은 마케도니아 항구에 대한 봉쇄를 형성하고 기원전 417년에 할키디케를 침공할 수 있었다.[40] 페르디카스 2세는 기원전 414년에 평화를 구걸했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마케도니아의 아르켈라오스 1세가 계속 유지했던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41] 아테네는 410년경 마케도니아의 피드나 포위 공격에서 목재와 해군 장비를 대가로 아르켈라오스 1세에게 해군 지원을 제공했다.[42]
아르켈라오스 1세는 일부 내부 반란에 직면했고 린케스티스의 시라스가 이끄는 일리리아의 침공을 막아야 했지만, 그는 테살리아로 마케도니아의 힘을 투사하여 동맹국에게 군사적 지원을 보낼 수 있었다.[43] 그는 아이가이를 의례적이고 종교적인 중심지로 유지했지만, 아르켈라오스 1세는 왕국의 수도를 북쪽 펠라로 옮겼는데, 그곳은 강과 연결된 호수에 위치해 에게 해와 연결되어 있었다.[44] 그는 은화 함량이 높은 금화를 주조하고 별도의 구리 주화를 발행하여 마케도니아의 통화를 개선했다.[45] 그의 왕실 궁정은 아테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유명한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46] 아르켈라오스 1세가 암살되었을 때 (아마도 그의 궁정에서 동성애적 사랑 행위로 인해), 왕국은 기원전 399년부터 393년까지 혼란에 빠졌는데, 이 시기에는 4명의 다른 군주가 통치했다. 오레스테스, 아르켈라오스 1세의 아들, 에로푸스 2세, 오레스테스의 삼촌, 섭정, 살인자, 파우사니아스, 에로푸스 2세의 아들, 그리고 아르켈라오스 1세의 막내딸과 결혼한 아민타스 2세.[47] 이 격동의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마케도니아의 아민타스 3세, 아르히다이오스의 아들이자 아민타스 1세의 손자인 파우사니아스를 죽이고 마케도니아 왕위를 주장하면서 이 시기는 끝났다.[48]
아민타스 3세는 일리리아인들의 대규모 침략으로 인해 393년 또는 383년경 (상반된 설명에 근거) 왕국에서 도망쳐야 했다.[49] 왕위 찬탈자 아르가이오스는 그가 부재한 동안 통치했지만, 아민타스 3세는 결국 테살리아 동맹국들의 도움을 받아 왕국으로 돌아왔다.[50] 아민타스 3세는 또한 할키디케 도시 올린토스의 군대에 의해 거의 전복될 뻔했지만,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의 형제 텔레우티아스의 도움으로 마케도니아인들은 올린토스를 항복하게 하고 기원전 379년에 그들의 할키디케 동맹을 해산시켰다.[51]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2세, 에우리디케 1세와 아민타스 3세의 아들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즉시 테살리아를 침공하여 ''타구스''(테살리아 최고 군사 지도자)인 페라이의 알렉산더와 전쟁을 벌여 라리사를 점령했다.[52] 테살리아인들은 알렉산더 2세와 페라이의 알렉산더 모두를 주군에서 제거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테베의 펠로피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라리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마케도니아와 맺은 평화 협정에서 알렉산더 2세의 형제이자 미래의 왕인 필리포스 2세를 포함한 귀족 인질을 받았다.[53] 알렉산더가 그의 매제 알로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암살당하자, 후자는 알렉산더 2세의 동생인 마케도니아의 페르디카스 3세의 횡포한 섭정 역할을 했고, 페르디카스 3세는 365년에 성년이 되자 결국 프톨레마이오스를 처형했다.[54] 페르디카스 3세의 통치 기간의 나머지는 정치적 안정과 재정 회복으로 특징지어졌다.[55] 그러나 코논의 아들 티모테오스가 이끄는 아테네의 침공은 메토네와 피드나를 점령했고, 바르딜리스가 이끄는 일리리아의 침공은 페르디카스 3세와 4,000명의 마케도니아 군인을 전투에서 죽이는 데 성공했다.[56]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59년에 왕위에 올랐을 때 스물 네 살이었다.[57] 그는 능숙한 외교술을 통해, 베리사데스 치하의 트라키아인들이 왕위 찬탈자 파우사니아스를, 그리고 아테네인들이 또 다른 왕위 찬탈자를 지원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58] 그는 트라키아인들과 그들의 파이오니아 동맹에게 뇌물을 주고 아테네와 암피폴리스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이를 달성했다.[59] 그는 또한 자신의 국경을 위협했던 일리리아인들과 평화를 맺을 수 있었다.[60]
필리포스 2세는 즉위 초기에 마케도니아 군대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조직, 장비 및 훈련을 개혁하고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도입한 것은 그의 일리리아 및 파이오니아 적들을 상대로 한 시험에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61] 고대 자료에 혼란스러운 기록이 있어 현대 학자들은 필리포스 2세의 왕가 선조들이 이러한 개혁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그리고 그의 아이디어가 테베 헤게모니 시대에 정치적 인질로 테베에서 보낸 청소년기의 영향, 특히 장군 에파미논다스를 만난 후의 영향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62]
다른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마케도니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시행했지만, 필리포스 2세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했고, 아마도 귀족 신하들이나 새로운 동맹국의 충성을 얻는 데 관여하지 않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일곱 명의 아내와 결혼했다.[63]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상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엘리메이아의 필라와 결혼 동맹을 보장하기 위한 일리리아 공주 아우다타였다.[64] 테살리아의 라리사와 동맹을 맺기 위해 그는 기원전 358년에 테살리아 귀족 여성 필린나와 결혼했고, 그녀는 나중에 필리포스 3세 아르히다이오스로 통치하게 될 아들을 낳았다.[65] 기원전 357년에는 에피루스의 왕이자 몰로시아인의 왕인 아리바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올림피아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통치하게 될 아들을 낳았으며, 전설적인 아킬레우스의 에피루스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66]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왕들이 필리포스 2세의 일부다처제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선조인 아민타스 3세는 두 번째 아내 기가이아와의 사이에서 아르케라오스, 아르히다이오스, 메넬라오스의 세 아들을 두었다.[67]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59년에 아르케라오스를 처형했고, 필리포스 2세의 다른 두 이복 형제는 올린토스로 도망쳐 찰키디케 동맹에 대항한 올린토스 전쟁 (기원전 349–348년)의 카수스 벨리가 되었다.[68]
아테네가 사회 전쟁 (기원전 357–355년)에 몰두하는 동안,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57년에 암피폴리스를 탈환했고, 이듬해에는 퓨드나와 포티데아를 재점령했으며, 후자는 조약에서 약속한 대로 찰키디케 동맹에 넘겨주었다.[69] 기원전 356년에는 크레니데스를 점령하여 필리피로 재건했으며, 그의 장군 파르메니온은 그라바에의 일리리아 왕 그라보스 2세를 격파했다.[70] 기원전 355–354년 메토네 포위전에서 필리포스 2세는 화살에 맞아 오른쪽 눈을 잃었지만,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포티데아인과는 달리 주민들을 정중하게 대우했다.[71]
필리포스 2세는 그 후 제3차 신성 전쟁 (기원전 356–346년)에 마케도니아를 참여시켰다. 이는 포키스가 미납 벌금을 제출하는 대신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점령하고 약탈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 암피크티오닉 동맹은 포키스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테살리아 동맹 구성원들 사이에 포키스 또는 테베와 동맹을 맺은 내전이 발생했다.[72]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53년에 라리사의 요청으로 테살리아의 페라이를 상대로 한 초기 원정에서 포키아 장군 오노마르쿠스에게 두 번의 참패를 당했다.[73]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52년에 크로쿠스 필드 전투에서 오노마르쿠스를 격파했는데, 이로 인해 필리포스 2세는 테살리아 동맹의 지도자 (''아르콘'')로 선출되었고, 암피크티오닉 의회에 자리를 얻었으며, 페라이의 야손 폭군의 조카인 니케시폴리스와 결혼함으로써 페라이와 결혼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74]
필리포스 2세는 특히 아케메네스 왕의 중앙 권위에 반란을 일으킨 사트라프와 용병을 지원함으로써 아케메네스 제국과 초기에 관여했다. 헬레스폰트 프리지아의 사트라프인 아르타바조스 2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후 기원전 352년부터 342년까지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망명 생활에 가족과 용병 장군 로도스의 멤논을 동반했다.[75][76] 아르타바조스의 딸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미래 아내인 바르시네는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자랐다.[76]
기원전 349년에 트라키아 통치자 케르소블렙테스를 상대로 원정을 벌인 후, 필리포스 2세는 일시적인 해산 이후 기원전 375년에 재건된 찰키디케 동맹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77] 카리데모스의 아테네 개입에도 불구하고[78] 올린토스는 기원전 348년에 필리포스 2세에게 점령되었고, 그 주민들은 일부 아테네 시민권을 포함하여 노예로 팔렸다.[79] 아테네인, 특히 데모스테네스가 쓴 일련의 연설인 ''올린토스 연설''에서 동맹국을 설득하여 반격을 시도하는 데 실패했고, 기원전 346년에는 마케도니아와 필로크라테스의 평화로 알려진 조약을 체결했다.[80] 이 조약은 아테네가 마케도니아 연안 영토, 찰키디케, 암피폴리스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노예가 된 아테네인들을 석방하고 필리포스 2세가 트라키아 케르소네소스의 아테네 정착지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제공하는 것을 규정했다.[81] 한편, 포키스와 테르모필레는 마케도니아군에 점령되었고, 델포이 신전 강도들은 처형되었으며, 필리포스 2세는 암피크티오닉 의회에서 포키스 두 자리를 수여받고 피티아 경기의 주례자 지위를 받았다.[82] 아테네는 처음에는 그의 의회 참여에 반대했고, 항의의 표시로 경기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데모스테네스가 그의 연설 ''평화에 관하여''에서 설득한 후 이러한 조건을 결국 받아들였다.[83]
그 후 몇 년 동안 필리포스 2세는 테살리아의 지방 정부를 개혁하고, 일리리아 통치자 플레우라투스 1세에 대항하여 원정을 벌였으며, 에피루스에서 올림피아스와의 결혼을 통해 아리바스를 대신하여 그의 매형 알렉산드로스 1세를 옹립하고, 트라키아의 케르세블렙테스를 격파했다. 이를 통해 그는 아케메네스 아나톨리아 침공을 예상하여 헬레스폰트에 대한 마케도니아의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85] 기원전 342년에는 필리포스 2세가 현재 불가리아에 있는 트라키아 도시를 정복하고 필리포폴리스 (현대 플로브디프)로 개명했다.[86] 기원전 340년에는 필리포스 2세가 페린투스와 비잔티온을 상대로 두 번의 실패한 포위 공격을 벌이는 동안 아테네와 전쟁이 발발했고, 그 후 다뉴브 강을 따라 스키타이인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으며, 기원전 339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암피사에 대한 제4차 신성 전쟁에 참여했다.[87] 테베는 니카이아 (테르모필레 근처)에서 마케도니아 주둔군을 몰아냈고, 테베는 아테네, 메가라, 코린토스, 아카이아, 에우보이아와 함께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마지막 대결을 벌였다.[88] 카이로네이아에서 마케도니아의 승리 후, 필리포스 2세는 테베에 과두 정치를 세웠지만, 아케메네스 제국 침공을 계획하여 아테네 해군을 활용하고자 했던 아테네에 대해서는 관대했다.[89] 그는 그 후 스파르타를 제외한 주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포함하는 코린토스 동맹을 결성하는 데 주로 책임을 졌다. 기원전 337년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동맹에서 공식적으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포스 2세는 그 의회 (''시네드리온'')의 지도자 (''헤게몬'')로 선출되었고, 다가오는 아케메네스 제국 침공의 총사령관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르'')으로 선출되었다.[90] 그리스인들의 고통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처벌과 소아시아 그리스 도시들의 해방 계획[91]과 또 다른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범 헬레니즘적 공포는 아케메네스 제국 침공 결정에 기여했다.[92]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341–340년에 페린투스와 비잔티온을 지원했는데, 이는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서부 아나톨리아의 사트라피에 대한 통제를 더욱 공고히함에 따라 아케메네스 침략이 증가하는 데 대해 마케도니아가 트라키아와 에게해를 확보
3. 3. 그리스 제패
필리포스 2세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파이오니아인, 트라키아인, 일리리아인의 땅까지 영토를 넓혔다. 또 펠라고니아와 남부 파이오니아도 병합하였다.[414]
필리포스는 전통적인 호플리테스 군대의 전투력을 높이고자 여러 가지 변화를 주어 마케도니아의 군대를 개혁하였다. 그는 중무장 기병대인 헤타이로이와 경보병대를 신설하였는데, 둘 다 매우 유연하고 군대와 잘 대응하였다. 또 주력 보병대의 경우 창의 길이를 늘리고, 방패 크기를 줄여 공격 능력을 향상시켰다.
필리포스는 왕국의 영토를 급속히 넓히기 시작하였다. 그는 북쪽으로 일리리아인 등 非그리스인 종족들을 공격하여 북부 국경을 확보하고 전사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 다음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에게 해 북쪽 해안의 영토를 얻었다. 이 지방의 가장 중요한 도시는 암피폴리스로, 트라케의 관문을 장악할 수 있는 도시였으며, 귀중한 은광도 가까웠다. 이 지역은 아테나이의 영토였으며, 이들은 여전히 암피폴리스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여겼다. 아테나이는 떠오르는 마케도니아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동맹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이들은 필리포스가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테살리아의 상당 지역을 점령했을 때도 거의 막지 못하였다.
테살리아를 장악하면서 필리포스는 그리스 중앙의 정치에 더 가까이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356년에 제3차 신성 전쟁으로 포키스가 테바이와 그 동맹국과 전쟁을 벌였다. 테바이는 마케도니아인을 군대에 끌어들여, 크로코스 평야 전투에서 필리포스는 포키스와 아테나이 동맹국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는 근린 동맹에서 패자(覇者)가 되었고 필리포스는 퓌티아 경기의 수장이 되어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정계 중심의 패권을 다졌다.
아테나이와 계속 투쟁하면서, 필리포스는 뷔잔티온과 보스포로스 해협을 차지하고자 트라케를 따라 동진하여, 아테나이에 식량 상당수를 공급하는 흑해 곡물 공급선을 차단하였다. 뷔잔티온 공성전은 실패하였으나, 아테나이는 마케도니아의 발흥이 심대한 위협이 되었음을 깨달았으며, 데모스테네스의 지도로 마케도니아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주요 국가들의 연대를 창설하였다. 도시 국가 가운데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테바이도 이에 동참하였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동맹군은 마케도니아와 맞붙었으나 대패하였고,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군은 확실하게 그리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3. 4. 마케도니아 제국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짧은 시간에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물론 페르시아 제국, 이집트, 인도 접경 지역까지 진출하였다.[141]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에서 그리스 문화를 퍼뜨렸다.[141] 마케도니아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여러 헬레니즘 정권으로 갈라졌지만, 정복의 영향은 계속되었으며,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옛 페르시아 제국 서쪽 영토에 새로 세워진 그리스어권 도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디아도코이(후계자) 사이에 분할되면서, 마케도니아는 수년 뒤인 기원전 294년에 안티파트로스 왕조로 넘어갔다.[141]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대왕)가 뒤를 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에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하여, 기원전 333년 이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알벨라·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시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여 페르시아 정복을 실현한다.
페르시아 정복에 성공한 후에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계속되어 인도의 외곽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이 세계 제국의 실현으로 그리스의 문화와 사상이 각지로 퍼져나갈 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의 교류와 민족의 융합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헬레니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급사하자, 휘하 장군들(디아도코이)에 의한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한 결과, 아르기아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유럽 측 영토에는 안티파트로스 왕조가 세워졌고, 안티고노스 왕조가 소아시아에 거점을 두었으며, 세 세력 간의 싸움 속에서 안티고노스 왕조가 살아남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제국의 세 개로 분열되었다.
3. 5. 헬레니즘 시대
안티파트로스와 그의 아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를 지배하였으나, 기원전 297년 카산드로스가 죽자 마케도니아는 오랫동안 내부 갈등에 휩싸였다. 데메트리오스 1세(기원전 294~288년)가 잠시 안정을 회복하는 듯 했으나, 다시 내전에 빠졌다.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는 용병 갈라티아인의 침략을 무찌르고 마케도니아에서 왕가의 위상을 되찾았다. 그는 질서와 번영을 회복하였으나,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의 통제권을 잃었다. 안티고노스는 안티고노스 왕조하의 안정적인 군주정 체제를 세웠으며, 안티고노스 3세는 그리스 지역에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마케도니아 정권은 다른 헬레니즘 군주 국가들과 달리 옛 고졸기의 왕권 개념을 유지한 유일한 후계 국가였다. 마케도니아 왕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나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처럼 신격화되지 않았으며, 프로스퀴네시스(높은 계급의 사람 앞에서 엎드려 예를 표하는 페르시아 관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 고대 마케도니아인들은 다른 디아도코이 국가의 신민들보다 훨씬 허물없이 임금을 대하였으며, 임금은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여전히 귀족들과 상의하였다.[141][142][143][144][145][146][147][148][149][150][151][152][153][154][155][156][157][158][159][160][161][162][163][164][165][166][167][168][169][170][171][172][173][174][175][176][177][178][179][180][181][182][183][184][185][186][187][188][189][190][191][192][193][194][195][196][197][198][199][200][201][202][203][204][205][206][207][208][209][210][211][212][213][214][215][216][217][218][219]
3. 6. 로마와의 충돌
필리포스 5세와 그의 아들 페르세우스 시대에 마케도니아 왕국은 새롭게 떠오르는 강국 로마와 충돌하였다. 기원전 2~1세기에 마케도니아는 로마와 일련의 전쟁(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다.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97년에 필리포스 5세가, 기원전 168년에는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크게 패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패배로 안티고노스 왕가는 폐위되고 왕국은 분할되었다. 기원전 149년에 '가짜 필리포스' 안드리스코스가 잠시 왕국을 복원하였으나, 이듬해에 로마에 패배하고,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직접 지배를 받게 되어 마케도니아 속주가 설치되었다.[183]
기원전 215년, 카르타고 제국과의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로마는 칼라브리아 해안에서 마케도니아 사절과 한니발이 작성한 조약을 소지한 카르타고 대사를 태운 배를 나포했다.[184] 이 조약은 카르타고가 로마의 항복 조건을 협상할 독점적 권한을 가지며, 로마가 마케도니아나 카르타고에 복수할 경우 상호 지원을 약속했다.[185] 마케도니아는 일리리아에서 새로 정복한 영토를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만,[186] 로마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214–205년) 동안 필리포스 5세가 아드리아 해 지역에 가졌던 야심을 좌절시켰다. 기원전 214년, 로마는 오리쿠스에 해군 함대를 배치했고, 마케도니아군은 아폴로니아와 함께 그곳을 공격했다.[187] 마케도니아군이 기원전 212년에 리수스를 점령하자, 로마 원로원은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엘리스, 메세니아,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 (재위 기원전 241–197년)를 선동하여 필리포스 5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게 하여, 그를 이탈리아에서 멀리 묶어두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기원전 206년에 필리포스 5세와 평화 협정을 맺었고,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205년에 페니키아 조약을 협상하여 전쟁을 종결하고 마케도니아가 일리리아에서 점령한 일부 정착지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188] 로마는 기원전 202년에 아이톨리아가 다시 마케도니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기원전 201년에 페르가몬과 그 동맹국 로도스가 제안한 유사한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했다.[189] 이들 국가는 필리포스 5세가 안티오코스 3세 (셀레우코스 제국)와 동맹을 맺은 것을 우려했는데, 안티오코스 3세는 제5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202–195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침공했고, 필리포스 5세는 에게 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정착지를 점령했다.[190] 로마 사절은 기원전 200년에 아테네가 페르가몬 및 로도스와 함께 반마케도니아 동맹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센투리아 민회''(민회)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전쟁 선포에 대한 로마 원로원의 제안을 거부했다.[191] 한편, 필리포스 5세는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는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사모스까지 정복했고, 이로 인해 로도스는 페르가몬, 비잔티움, 키지쿠스, 키오스와 동맹을 맺어 마케도니아에 대항했다.[192] 필리포스 5세는 셀레우코스 왕과 명목상 동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201년에 키오스 해전에서 패배했고, 로도스와 페르가몬 해군에 의해 바르길리아에서 봉쇄되었다.[193]
필리포스 5세가 로마의 그리스 동맹국과 싸우는 동안, 로마는 이를 한니발의 이전 동맹국을 벌할 기회로 보고 승리하여 자원을 거의 소모하지 않는 전쟁을 원했다.[194] 로마 원로원은 필리포스 5세에게 인접한 그리스 세력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 중재 위원회에 따르라고 요구했다.[195] ''센투리아 민회''가 기원전 200년에 로마 원로원의 전쟁 선포를 승인하고 로도스와 페르가몬에 대한 손해를 평가할 재판소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필리포스 5세에게 전달했을 때, 마케도니아 왕은 이를 거부했다. 이것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200–197년)의 시작을 알렸고,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가 군사 작전을 아폴로니아에서 지휘했다.[196]
마케도니아군은 약 2년 동안 영토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197] 로마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기원전 198년에 필리포스 5세를 마케도니아에서 몰아내 테살리아로 피신하게 만들었다.[198] 아카이아 동맹이 마케도니아에서 로마로 충성심을 바꾸자, 마케도니아 왕은 평화를 구했지만, 제시된 조건이 너무 가혹하여 전쟁이 계속되었다. 기원전 197년 6월, 마케도니아군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패배했다.[199] 로마는 마케도니아에게 마케도니아 본토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리스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조약을 비준하여, 일리리아와 트라키아의 그리스 침략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하도록 했다.[200] 일부 그리스인들은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새로운 패권 세력으로 대체하려는 의도를 의심했지만, 플라미니누스는 기원전 196년 이스미아 경기에서 로마가 그리스에 주둔지를 남기지 않고 어떤 종류의 공물도 징수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의 자유를 보존하려 한다고 발표했다.[201] 그의 약속은 아르고스를 점령한 스파르타 왕 나비스와의 협상으로 지연되었지만, 로마군은 기원전 194년에 그리스에서 철수했다.[202]
아이톨리아 동맹의 격려와 로마로부터 그리스를 해방하라는 외침에 힘입어,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192년에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아이톨리아인에 의해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되었다.[203]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동맹 및 기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했다.[204] 로마는 기원전 191년 테르모필레 전투와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군을 격파하여, 셀레우코스군이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해군의 대부분을 해체하고, 기원전 188년 아파메아 조약에서 타우루스 산맥 북쪽과 서쪽의 모든 영토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205] 로마의 승인으로 필리포스 5세는 기원전 191–189년에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었던 중앙 그리스의 일부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고, 한편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 (재위 기원전 197–159년)는 소아시아에서 영토를 획득했다.[206]
여러 영토 분쟁에서 모든 측을 만족시키지 못한 로마 원로원은 기원전 184/183년에 필리포스 5세에게 아이노스와 마로니아를 포기하도록 강요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아파메아 조약에서 자유 도시로 선언되었기 때문이다.[207] 이는 에우메네스 2세가 마케도니아가 헬레스폰트의 자신의 영토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완화시켰다.[208] 페르세우스 (재위 기원전 179–168년)는 필리포스 5세의 뒤를 이어 로마가 선호했지만 페르세우스에 의해 반역죄로 기소된 동생 데메트리우스를 처형했다.[209] 그 후 페르세우스는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 2세 및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셀레우코스 제국)와의 결혼 동맹을 시도했으며, 로도스와의 관계를 갱신하여 에우메네스 2세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210] 에우메네스 2세는 이러한 외교 관계를 훼손하려 했지만, 페르세우스는 보이오티아 동맹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일리리아 아브루폴리스와 트라키아까지 권위를 확장했으며, 기원전 174년에는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관리자로 암피크티온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211]
에우메네스 2세는 기원전 172년에 로마에 와서 원로원에서 페르세우스의 범죄와 위반 사항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212] 이는 로마 원로원이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71–168년)을 선포하도록 설득했다.[213] 페르세우스의 군대가 기원전 171년 칼리니쿠스 전투에서 로마군에 승리했지만, 마케도니아군은 기원전 168년 6월 피드나 전투에서 패배했다.[214] 페르세우스는 사모트라케로 도망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했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로마 개선을 위해 로마로 끌려와 알바 푸켄스에 가택 연금되었고, 기원전 166년에 사망했다.[215]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신 네 개의 별개의 동맹 공화국을 설립했는데, 수도는 암피폴리스, 테살로니카, 펠라, 펠라고니아에 위치했다.[216] 로마는 이들 공화국 주민들 간의 많은 사회적, 경제적 교류를 금지하는 가혹한 법을 부과했는데, 여기에는 그들 간의 결혼 금지 및 금과 은 광산의 (일시적인) 금지가 포함되었다.[216] 안티고노스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안드리쿠스라는 자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고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50–148년) 동안 로마 프라에토르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탈나의 군대를 격파하여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2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리쿠스는 기원전 148년 두 번째 피드나 전투에서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에게 패배했고, 그의 군대는 왕국을 점령했다.[218] 이는 기원전 146년의 카르타고 파괴와 코린토스 전투에서 아카이아 동맹에 대한 로마의 승리로 이어졌으며, 로마의 그리스 시대를 열고 마케도니아 로마 속주의 점진적인 건설을 시작했다.[219]
4. 정치 및 사회 제도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부는 왕을 수장으로 하였다.[220] 왕은 왕실 시종(바실리코이 파이데스), 호위병(소마토필라케스), 동료, 친구, 군대 구성원, 치안 판사들의 도움을 받았다.[221]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왕과 권력을 나누었는지는 불분명하다.[222]
초기 마케도니아의 정부 형태는 군주제였으며, 이는 로마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다.[224] 마케도니아의 세습 군주제는 적어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미케네 그리스 시대의 귀족적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225] 투키디데스는 마케도니아가 작은 부족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역은 자체적인 영주를 두었으며, 하 마케도니아 부족들이 상 마케도니아의 작은 왕들에 대한 종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왕 아래로 합쳐졌다고 기록했다.[226]
마케도니아 왕들은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자[231] 국가의 대사제 역할을 수행했다. 필리포스 2세는 매일 제의 희생을 수행하고 종교 축제를 주도하는 등 경건한 행위로 높이 평가받았다.[232]
왕실 시종은 귀족 가문 청소년들로 구성되었으며, 정치에 입문하는 수단이었다.[236] 훈련 후 왕의 측근이 되었다.[237] 이들은 왕을 경호하고, 말을 제공하고, 사냥에 동행하며, 심포지엄에서 시중을 들었다.[238]
친위 기병대와 ''페제타이로이'' 보병을 포함하는 동료들은 왕의 호위병보다 훨씬 컸다.[240] 가장 신뢰받는 동료들은 왕에게 자문하는 평의회를 구성했다.[241] 전쟁 시에는 군대 회의, 평화 시에는 인민 회의가 있었다.[242] 평의회는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고, 왕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243] 반역죄 재판, 형벌 부과 권한도 있었다.[244] 그러나 평의회와 회의가 정기적이었는지, 왕이 항상 결정을 따랐는지는 불분명하다.[245]
안티고노스 왕조는 다양한 지역 관리들에게 의존했다.[248] 군사 스트라테고스, 폴리타르크, ''에피스타테스'' 등이 있었다.[249]
마케도니아 왕과 중앙 정부는 사원과 사제직에서 창출된 수입을 관리했다.[256] 마케도니아 연방 내에서 대외 관계는 중앙 정부가 처리했다. 개별 마케도니아 도시들은 명목상 독립된 실체로서 범헬레니즘 행사에 참여했지만, 실제로는 특정 도시에 대한 ''아쉴리아''(불가침, 외교 면제, 피난처의 피난의 권리)의 부여는 왕이 직접 처리했다.[257]
4. 1. 권력 분할
마케도니아 왕국 정부의 수장은 왕(''바실레우스'')이었다.[220] 왕은 왕실 시종(''바실리코이 파이데스''), 호위병(''소마토필라케스''), 동료(''헤타이로이''), 친구(''필로이''), 군대 구성원을 포함하는 회의,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 동안) 치안 판사들의 도움을 받았다.[221] 그러나 이들이 왕과 권력을 실제로 나누었는지, 헌법에 따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222] 필리포스 2세 이전에는 왕정만이 유일한 제도였다.[223]왕립 시종은 귀족 가문 청소년들로 구성되었으며, 정치에 입문하는 수단이었다.[236] 훈련 후 왕의 측근이 되었다.[237] 이들은 왕을 경호하고, 말을 제공하고, 사냥에 동행하며, ''심포지엄''에서 시중을 들었다.[238]
왕실 근위대는 왕과 가장 가까운 이들이었다.[236] ''아게마''와 ''히파스피스테스''로 구성된 근위대와 왕이 직접 뽑은 소규모 근위대가 있었다.[236] 이들은 왕의 측근이었지만, 항상 왕을 보호하지는 않았다.[236]
친위 기병대와 ''페제타이로이'' 보병을 포함한 동료들은 왕의 호위병보다 훨씬 컸다.[240] 가장 신뢰받는 동료들은 왕에게 자문하는 평의회를 구성했다.[241] 전쟁 시에는 군대 회의, 평화 시에는 인민 회의가 있었다.[242]
평의회는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고, 왕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243] 반역죄 재판, 형벌 부과 권한도 있었다.[244] 그러나 평의회와 회의가 정기적이었는지, 왕이 항상 결정을 따랐는지는 불분명하다.[245]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동료들은 평의회를 구성했지만, 곧 갈등으로 불안정해졌다.[246] 군대는 반란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다.[247]
안티고노스 왕조는 다양한 지역 관리들에게 의존했다.[248] 군사 스트라테고스, 폴리타르크, ''에피스타테스'' 등이 있었다.[249] 이들은 귀족 출신의 ''필로이''와 ''헤타이로이'' 중에서 선택되었을 것이다.[250]
4. 2. 왕권과 왕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초기 정부 형태는 군주제였으며, 기원전 167년 로마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다.[224] 마케도니아의 세습 군주제는 적어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미케네 그리스 시대의 호메로스식 귀족적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225] 투키디데스는 이전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작은 부족 지역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은 자체적인 영주를 두었으며, 하 마케도니아의 부족들은 마침내 상 마케도니아의 작은 왕들에 대한 종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위대한 왕 아래로 합쳐졌다고 기록했다.[226] 기원전 396년 마케도니아의 오레스테스가 암살된 후, 부자 상속의 직계 계승은 끊어졌으며, 장자 상속이 확립된 관습이었는지 또는 군대의 회의나 민회가 다른 왕을 선택할 수 있는 헌법적 권리가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불분명해졌다.[227]필리포스 2세 이전의 마케도니아 왕들은 외국 외교관을 접대하고, 왕국의 외교 정책을 결정하며, 외국 세력과의 동맹을 협상하는 특권을 가졌다.[229] 예를 들어,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후, 페르시아 사령관 마르도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를 아테네에 수석 특사로 파견하여 아케메네스 제국과 아테네 간의 동맹을 조율하도록 했다.[229] 금, 은, 목재, 왕실 토지를 포함한 천연 자원을 소유한 초기 마케도니아 왕들은 인상적인 선물로 국내외 세력을 뇌물로 매수할 수도 있었다.[230]
마케도니아 왕들은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었으며,[231] 국가의 대사제 역할도 수행했다. 필리포스 2세는 매일 제의 희생을 수행하고 종교 축제를 주도하는 등 경건한 행위로 높이 평가받았다.[232]
4. 3. 왕실 시종
왕립 시종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귀족 가문에서 징집된 청소년과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필리포스 2세 치세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보다 확실한 증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세에서 발견된다.[235] 왕립 시종들은 고위 정치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치 생활에 그들을 입문시키는 수단으로 징집되었다.[236] 훈련과 복무 기간을 거친 후, 시종들은 왕의 동료이자 측근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237] 훈련 기간 동안 시종들은 왕이 잠잘 때 경호하고, 말을 공급하며, 그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돕고, 왕의 사냥에 동행하며, ''심포지엄''(즉, 공식적인 음주 파티)에서 그를 섬겼다.[238] 안티고노스 왕조 시대의 왕립 시종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지만, 일부는 기원전 168년 로마와의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가 패배한 후 사모트라케로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239]4. 4. 동료, 친구, 평의회 및 회의
친위 기병대와 ''페제타이로이'' 보병을 포함하는 동료들은 왕의 호위병보다 훨씬 더 큰 집단을 대표했다.[240] 가장 신뢰받거나 지위가 높은 동료들은 왕에게 자문 역할을 하는 평의회를 구성했다.[241] 소량의 증거에 따르면 전쟁 시에는 군대의 회의가, 평화 시에는 인민 회의가 존재했다.[242]평의회 구성원들은 자유롭게 발언할 권리가 있었고, 비록 그들이 국정에 대해 투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왕이 적어도 때때로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도록 압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243] 회의는 반역죄 사건을 재판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버지 암살 음모의 세 명의 용의자를 재판하고 유죄 판결을 내렸을 때처럼(다른 많은 사람들은 무죄 방면되었다) 형벌을 부과할 권한을 받았다.[244] 그러나 평의회와 회의가 정기적으로 유지되었거나 헌법적으로 기반을 두었는지, 또는 그들의 결정이 항상 왕에 의해 지켜졌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증거가 없다.[245]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동료들은 그의 제국을 통제하기 위해 즉시 평의회를 구성했지만, 곧 구성원들 간의 공개적인 경쟁과 갈등으로 인해 불안정해졌다.[246] 군대는 또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반란을 도구로 사용했다.[247]
4. 5. 행정관, 연방, 지방 정부 및 동맹국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들은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지역 관리들에게 의존했다.[248] 여기에는 군사 스트라테고스 및 폴리타르크와 같이 지위가 높은 지방 관리, 즉 대도시(''폴리스'')의 선출된 지사(''아르콘'')와 정치-종교적 직위인 ''에피스타테스''가 포함되었다.[249]고대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322년에 안티파테르가 도시를 처음 정복한 후 세 차례에 걸쳐 아테네 민주주의가 부활했다.[251]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반복적으로 받으면서 도시 국가는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구성원으로 구성된 마케도니아가 강요한 과두정치에 의해 통치되었다.[252] 다른 도시 국가들은 상당히 다르게 처리되었고 더 큰 수준의 자치권을 허용받았다.[255] 필리포스 2세가 기원전 357년에 암피폴리스를 정복한 후, 도시는 헌법, 민회, 도시 평의회(''불레'') 및 새로운 관리의 연례 선거를 포함한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도시의 정치적 문제를 감시하기 위해 마케도니아 수비대와 함께 마케도니아 왕실 사절(''에피스타테스'')이 도시 성벽 내에 주둔했다.[253] 필리포스 2세가 건설한 도시인 필리피는 민회가 있는 민주 정부를 가진 마케도니아 연방의 유일한 다른 도시였으며, 테살로니키의 민회(''에클레시아'')는 실제로는 수동적인 기능만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254]
일부 도시는 자체적인 지방 수입도 유지했다.[255] 마케도니아 왕과 중앙 정부는 사원과 사제직에서 창출된 수입을 관리했다.[256]
마케도니아 연방 내에서, 기원전 3세기의 일부 증거에 따르면 대외 관계는 중앙 정부가 처리했다. 개별 마케도니아 도시들은 명목상 독립된 실체로서 범헬레니즘 행사에 참여했지만, 실제로는 특정 도시에 대한 ''아쉴리아''(불가침, 외교 면제, 피난처의 피난의 권리)의 부여는 왕이 직접 처리했다.[257] 마찬가지로, 현대 그리스의 ''코이논''(즉, 도시 국가의 연맹, ''심폴리테이아'') 내의 도시 국가들은 연맹 회원들이 집단적으로 투표하여 결정한 연방 법령을 따랐다.[258] 연맹 또는 공화국에 속한 도시 국가에서 ''프록세니아''(즉, 외국 대사 유치)의 부여는 일반적으로 지방 및 중앙 당국이 공유하는 권리였다.[259] 인접한 에피로스 연맹에서 중앙 당국만이 ''프록세니아''를 부여하는 유일한 특권이었음을 보여주는 풍부한 증거가 있으며, 마케도니아 연방에서도 동일한 배열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260]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은 도시 국가들은 ''프록세니아''에 관한 자체 법령을 발표했다.[261] 외국 연맹 또한 마케도니아 왕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예를 들어 크레타 연맹이 데메트리우스 2세 아이톨리쿠스와 안티고노스 3세 도손과 조약을 체결하여 크레타 용병의 마케도니아 군대 입대를 보장하고, 필리포스 5세를 연맹의 명예 보호자(''프로스타테스'')로 선출한 경우와 같다.[262]
5. 군사
고대 마케도니아 군대는 동반 기병대(''헤타이로이'')와 보병 동반자(''페제타이로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다양한 동맹군, 외인 징집병, 용병으로 보강되었다.[263] 알렉산드로스 1세 때부터 보병 동반자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264] 갑옷을 착용한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나 스파르타 편에 서서 싸우며 명성을 얻었다.[265] 당시 마케도니아 보병은 훈련받지 못한 목동과 농부였고, 기병대는 귀족으로 구성되었다.[266]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의 군사 훈련과 표준 장비 지급 방식을 모방하여 마케도니아 군대를 정예 직업군으로 탈바꿈시켰다.[270] 그는 테베에서 인질 생활을 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270] 보병에게 ''사리사'' 장창과 단검을 지급하고 ''사리사''로 무장한 팔랑크스 보병대를 도입했다.[272] 또한 정예 ''히파스피스타이'' 보병대와 왕실 근위대를 창설하고,[273][274] 크레타 궁수, 트라키아, 파이오니아, 일리리아 투창병, 투석병, 궁수 등 용병을 고용했다.[275] 테살리아의 폴리이두스와 펠라의 디아데스 같은 엔지니어를 고용하여 대형 공성 무기와 쇠뇌 볼트를 발사하는 포병 전력도 갖추었다.[271]
안티고노스 왕조 시대 군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군대에서 더욱 발전했다. 히파스피스타이는 왕실 근위대의 조력자로 역할이 바뀌었고,[284] 기원전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은 약 16,000명의 팔랑크스 창병을 동원했다.[285]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방패 없이 싸웠지만, 기원전 270년대 갈라티아인들의 침입 이후 방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287] 당시 비문들을 통해 필리포스 5세 치하 안티고노스 군대의 구성을 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288] 정예 보병 펠타스트는 작은 청동 방패와 칼을 사용했지만, 때로는 창병 역할도 수행했다.[289] 이들은 ''칼라스피데스''(청동 방패)와 ''레우카스피데스''(흰 방패) 연대로 나뉜 팔랑크스 창병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292]
안티고노스 마케도니아 왕들은 해군을 지속적으로 확장했다.[293] 카산드로스와 데메트리오스 1세는 함대를 유지했고,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해군을 활용하여 그리스 영토를 확보했다.[294] 크레모니데스 전쟁 기간 동안 해군이 크게 확장되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해군을 격파하고 키클라데스 제도로 영향력을 넓혔다.[294] 안티고노스 3세 도손은 카리아 침공에, 필리포스 5세는 키오스 해전에 해군을 활용했다.[294] 비록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해군이 축소되었지만, 페르세우스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직전 ''렘보이''를 건조했다.[294]
5. 1. 초기 마케도니아 군대
고대 마케도니아 군대의 기본적인 구조는 동반 기병대(''헤타이로이'')와 보병 동반자(''페제타이로이'')로 나뉘었으며, 다양한 동맹군, 외인 징집병, 용병으로 보강되었다.[263] 보병 동반자는 알렉산드로스 1세 재위 기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64] 갑옷을 착용한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여하면서 그리스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때로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중 한 편에 섰다.[265] 이 시기 마케도니아 보병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목동과 농부로 구성되었으며, 기병대는 귀족으로 구성되었다.[266] 필리포스 2세 이전의 마케도니아 군대는 기원전 4세기 초의 예술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스파르타의 영향을 뚜렷하게 받았다.[267]니콜라스 빅토르 세쿤다는 필리포스 2세가 기원전 359년에 즉위했을 때 마케도니아 군대가 보병 10,000명과 기병 600명으로 구성되었다고 언급했지만,[268] 맬컴 어링턴은 고대 작가가 인용한 이러한 수치를 어느 정도 회의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경고한다.[269]
5. 2.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의 군사 훈련과 표준 장비 지급 사례를 모방하여 마케도니아 군대를 훈련이 잘 된 직업군으로 변모시켰다.[270] 그는 테베에서 수년간 정치적 인질로 지내면서 그리스의 군사 및 무술 훈련, 시민 병사들을 위한 표준 장비 지급의 사례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를 마케도니아에 적용했다.[270]필리포스 2세는 보병에게 ''사리사'' 장창과 단검을 지급하고, ''사리사'' 장창으로 무장한 팔랑크스 보병대를 도입했다.[272] 또한, 정예 ''히파스피스타이'' 보병대와 왕실 근위대를 창설하였다.[273][274] 그는 용병 크레타 궁수뿐만 아니라 트라키아, 파이오니아, 일리리아 투창 던지는 사람, 투석병, 궁수를 고용했다.[275]
필리포스 2세는 테살리아의 폴리이두스와 펠라의 디아데스와 같은 엔지니어를 고용하여 대형 공성 무기와 거대한 쇠뇌 볼트를 발사하는 최첨단 포병을 건설할 수 있었다.[271]
5. 3. 안티고노스 시대 군대
안티고노스 왕조 시대의 군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군대에서 계속 발전된 형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통치 말기에 8명으로 구성되었던 왕실 근위대(소마토필라케스)의 정확한 수는 불확실하지만, 히파스피스타이는 왕실 근위대의 조력자로 역할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284]기원전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은 약 16,000명의 팔랑크스 창병을 동원했다.[285]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실 기병대는 8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기원전 219년 사회 전쟁 당시 필리포스 5세가 지휘한 성스러운 기병대(라틴어: ''sacra ala''; 그리스어: ''hiera ile'')와 같은 규모였다.[286] 정규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칼리니쿠스에서 3,000명이었으며, 이는 성스러운 기병대와 왕립 기병대와는 별개였다.[286]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방패 없이 싸웠지만, 기원전 270년대 갈라티아인들의 침입 이후 기병대도 방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287]
기원전 218년과 181년에 각각 암피폴리스와 그레이아에서 발견된 당시 비문들 덕분에 역사가들은 필리포스 5세 치하 안티고노스 군대의 구성을 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288] 적어도 안티고노스 3세 도손 시대부터 가장 정예 안티고노스 보병은 펠타스트였는데, 이들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창병보다 작은 청동 방패와 칼을 사용했지만, 때로는 창병의 역할도 수행하는 가볍고 기동성이 뛰어난 병사들이었다.[289] 펠타스트 중 약 2,000명은 정예 ''아가마'' 선봉대에서 복무하도록 선발되었고, 나머지 펠타스트는 약 3,000명 정도였다.[290] 펠타스트의 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동했지만, 5,000명을 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291] 이들은 ''칼라스피데스''(청동 방패)와 ''레우카스피데스''(흰 방패) 연대로 나뉜 팔랑크스 창병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292]
안티고노스 마케도니아 왕들은 해군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장비를 확충했다.[293] 카산드로스는 피드나에 소규모 함대를, 데메트리오스 1세는 펠라에 함대를 유지했으며,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데메트리우스의 그리스 주둔군 장군으로 복무하면서 데메트리아스, 칼키스, 피라이에우스, 코린토스에 있는 마케도니아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해군을 활용했다.[294] 해군은 크레모니데스 전쟁 (기원전 267-261년) 기간 동안 크게 확장되었고, 이를 통해 마케도니아 해군은 기원전 255년 코스 전투와 기원전 245년 안드로스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해군을 격파하고 키클라데스 제도로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다.[294] 안티고노스 3세 도손은 마케도니아 해군을 이용하여 카리아를 침공했고, 필리포스 5세는 기원전 201년 키오스 해전에 200척의 배를 파견했다.[294] 마케도니아 해군은 기원전 197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종결하는 강화 조약에 따라 단 6척의 배로 축소되었지만, 페르세우스는 기원전 171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발발 직후 여러 척의 ''렘보이''를 건조했다.[294]
6. 사회와 문화
마케도니아의 사회와 문화는 헬레니즘 그리스의 시작과 함께 발전했다. 안티파트로스 왕조의 카산드로스와 안티고노스 왕조의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데메트리오스 1세 간의 권력 투쟁이 있었다.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리시마코스가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142]
카산드로스 사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5세와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테르 2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권력 다툼으로 혼란이 이어졌다.[145] 에피루스의 피로스가 개입하여 마케도니아 서부를 차지했고,[144] 데메트리오스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독재적인 통치 방식에 대한 반발로 인해 왕국은 피로스와 리시마코스에게 분할되었다.[145] 이후 리시마코스가 피로스를 몰아내고 마케도니아를 통일했으나,[147]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1세에게 패배하여 사망했다.[148] 셀레우코스 1세 역시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하고,[149] 켈트족 침략으로 마케도니아는 혼란에 빠졌다.[151] 안티고노스 고나타스가 켈트족을 격파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안정을 되찾았다.[152]
피로스는 로마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실패하고 마케도니아로 돌아와 안티고노스 2세를 몰아냈으나,[154] 그의 갈리아 용병들이 왕실 묘지를 약탈하면서 지지를 잃었다.[155] 피로스는 아르고스 포위 공격 중 사망했고,[157] 안티고노스 2세는 마케도니아를 다시 장악했다.[156]
아이토리아 동맹과 아카이아 동맹의 저항으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내 영향력을 잃었으나,[159]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동맹을 통해 세력을 유지했다.[160] 크레모니데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함락되면서 마케도니아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162]
시키온의 아라토스의 반란과 코린트의 알렉산더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지원으로 마케도니아는 다시 위기를 맞았으나,[164] 안드로스에서 승리하고 아카이아 동맹과 평화를 맺으면서 안정을 되찾았다.[165]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2세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에피루스와의 동맹을 잃고 펠로폰네소스 대부분을 상실했으나,[169] 일리리아의 도움으로 아이톨리아와 아카이아 동맹의 연합 해군을 격파했다.[170] 데메트리오스 2세 사후, 안티고노스 3세 도손이 섭정이자 왕으로 즉위하여 일리리아와 테살리아에서 승리했다.[172]
안티고노스 3세는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 3세에 맞서 아라투스와 동맹을 맺고 셀라시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파르타를 점령하고 그리스 내 마케도니아의 지배력을 회복했다.[175]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다르다니의 도전에 직면했으나,[178] 사회 전쟁 (기원전 220–217년)에서 승리하고 아이톨리아와 평화를 맺었다.[179] 그는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의 설득으로 일리리아를 확보하고 이탈리아 반도 침공을 시도했으나,[180] 로마의 개입으로 실패했다.[182]
기원전 5세기 아르켈라오스 1세 시대부터 마케도니아 엘리트들은 그리스 다른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수입하고, 심포지엄과 같은 전통을 유지했다.[320] 마케도니아의 금속 세공품은 아테네식 꽃병 모양을 따랐으며,[322] 데르베니 크라테르와 같이 정교한 금속 공예품이 발견되었다.[321] 회화와 모자이크는 마케도니아 예술의 중요한 형태로, 알렉산더 석관과 펠라의 사슴 사냥 모자이크 등이 대표적이다.[324]
고대 저술가들과 현대 학자들은 고대 마케도니아인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마케도니아인을 "진정한 그리스인"으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지만,[354] 로마 제국 시대 아리아노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 간의 민족적 차이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355] N. G. L. 해먼드는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의 차이를 정치 체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357]
6. 1. 언어와 방언
필리포스 2세 치세부터 궁정 언어로 채택된 이후, 고대 마케도니아의 작가들은 후기 고전 그리스와 헬레니즘 그리스의 공용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로 작품을 썼다.[295] 희귀한 문헌 증거는 고유의 마케도니아어가 테살리아 그리스어 및 북서부 그리스어와 유사한 그리스어의 방언이거나,[296] 또는 그리스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언어였음을 나타낸다.[297] 고대 마케도니아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비문은 아테네 그리스어와 그 후계 언어인 코이네로 작성되었다.[298] 아테네 그리스어 (그리고 이후의 코이네어)는 고대 마케도니아 군이 선호하는 언어였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심포지엄에서 클레이토스(Cleitus the Black)를 죽인 술자리에서 그의 친위대에게 마케도니아어로 긴급 명령을 외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99] 마케도니아어는 헬레니즘 시대 또는 로마 시대에 사멸 언어가 되었고, 코이네 그리스어로 완전히 대체되었다.[300][301]6. 2. 종교적 믿음과 장례 관습
마케도니아인들은 기원전 5세기경부터 그리스 신들의 판테온과 거의 동일한 신들을 숭배했다.[320] 마케도니아에서는 정치와 종교적 직책이 종종 뒤얽혔다. 예를 들어, 암피폴리스의 국가 원수는 그리스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제 역할도 했다.[320] 카산드레이아에서도 비슷한 배치가 있었는데, 도시의 창시자인 카산드로스를 기리는 종교 숭배 사제가 도시의 명목상 수장이었다.[320] 제우스의 주요 성소는 디온에 유지되었으며, 베리아에 있는 또 다른 성소는 헤라클레스에게 헌정되었고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쿠스가 후원했다.[320] 한편, 테살로니키에 있는 사라피스 신전과 같이 이집트에서 온 외래 종교가 왕실에 의해 육성되었다.[320] 마케도니아인들은 또한 "국제적인" 종교와 관계를 맺었는데, 예를 들어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3세와 알렉산드로스 4세는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카베이리 비밀 종교의 사모트라케 신전 단지에 봉헌물을 바쳤다.[320]베르기나에 있는 세 개의 왕족 무덤에서 전문 화가들은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신화적 장면과 왕실 사냥 장면으로 벽을 장식했고, 사망자와 함께 무덤 부장품으로 호화로운 무기, 갑옷, 술잔, 개인 소지품이 보관되었으며, 유골은 화장되어 금 관에 매장되었다.[320] 일부 무덤 부장품과 장식은 다른 마케도니아 무덤에서도 흔했지만, 베르기나에서 발견된 일부 품목은 디아뎀, 사치품, 무기와 갑옷을 포함하여 왕족과 뚜렷하게 연관되었다.[320] 학자들은 1977~1978년 발견 이후 무덤 거주자의 정체성에 대해 논쟁을 벌였으며, 최근 연구와 법의학적 검사 결과 최소 한 명의 매장된 인물이 필리포스 2세였다는 결론을 내렸다.[320] 무덤 1 근처에는 죽은 자에 대한 종교 숭배를 위한 신전인 ''히로온''의 지상 유적이 있다.[320] 2014년에는 고대 마케도니아 카스타 무덤이 암피폴리스 외부에서 발견되었으며, 2017년 현재 그리스에서 발견된 가장 큰 고대 무덤이다.[320]
6. 3. 경제와 사회 계층
젊은 마케도니아 남성들은 염소와 양 같은 가축을 기르는 계절 이동 생활 방식의 부산물인 수렵과 무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13] 말 사육과 소 사육도 일반적인 활동이었다.[313] 일부 마케도니아인들은 농업에 종사했는데, 종종 마케도니아 국가의 지원을 받는 관개, 간척, 원예 활동이 이루어졌다.[314] 마케도니아의 경제와 국가 재정은 주로 벌목과 구리, 철, 금, 은과 같은 귀중한 광물의 채광에 의해 지원되었다.[315] 이러한 원자재를 완제품으로 전환하고 해당 제품을 판매하는 것은 도시 중심지의 성장을 장려했으며, 기원전 5세기 동안 전통적인 소박한 마케도니아 생활 방식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316]마케도니아 왕은 정부와 사회의 수장으로서 독재적인 인물이었으며, 국사와 공공 정책을 처리할 수 있는 무한한 권한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또한 마케도니아 귀족의 핵심인 그의 ''헤타이로이''와 밀접한 관계 또는 연결을 맺고 있는 매우 개인적인 정권의 지도자이기도 했다.[317]
6. 4. 시각 예술


기원전 5세기 아르켈라오스 1세 통치 시대에 고대 마케도니아 엘리트들은 그리스 다른 지역에서 관습과 예술적 전통을 수입했다. 동시에 심포지엄과 관련된 보다 고풍스러운, 아마도 호메로스적인 장례 의식을 유지했는데, 이는 고인의 유골을 담는 장식용 금속 크라테르와 같은 품목으로 특징지어졌다.[320] 이 중에는 군 경력을 가진 귀족의 테살로니키의 기원전 4세기 무덤에서 나온 큰 청동 데르베니 크라테르가 있으며,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와 그의 측근의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다.[321] 마케도니아 금속 세공품은 대개 기원전 6세기부터 아테네식 꽃병 모양을 따랐으며, 음료 용기, 보석류, 용기, 왕관, 관 및 동전이 마케도니아 무덤에서 발견된 많은 금속 물체 중 하나였다.[322]
현존하는 마케도니아 회화 작품에는 프레스코와 벽화뿐만 아니라 조각된 작품(예: 조각상과 부조)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기원전 4세기 후반의 알렉산더 석관의 부조에는 아직 흔적이 남아 있다.[324] 마케도니아 회화는 역사가들이 고대 마케도니아인들이 착용한 의상 유행과 군사 장비를 조사할 수 있게 했다.[325] 금속 세공과 회화 외에 모자이크는 현존하는 마케도니아 예술의 또 다른 중요한 형태이다.[322] 펠라의 사슴 사냥 모자이크는 3차원적 특징과 환상적인 스타일로 회화 작품의 명확한 영향을 보여주며 더 넓은 헬레니즘 예술의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냥의 소박한 주제는 마케도니아인의 취향에 맞게 조정되었다.[326] 펠라의 비슷한 사자 사냥 모자이크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동반자 크라테루스와 함께 있는 장면이나 단순히 사냥이라는 왕실의 오락을 묘사한 것이다.[326] 신화적 주제의 모자이크에는 표범을 타는 디오니소스의 장면과 테세우스에게 납치되는 헬레네의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며, 후자는 마케도니아 회화와 유사한 환상적인 특징과 사실적인 음영을 사용한다.[326] 마케도니아 회화와 모자이크의 일반적인 주제에는 전쟁, 사냥, 공격적인 남성성 (예: 강간 또는 결혼을 위한 여성 납치)이 포함되며, 이러한 주제는 때때로 단일 작품 내에서 결합되어 은유적 연결을 나타낼 수 있다.[327]
6. 5. 연극, 음악 및 공연 예술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6년 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을 기념하는 경기와 볼거리가 열리던 중 아이가이의 극장에서 암살당했다.[328]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연극과 음악 모두에 큰 감탄을 보였다고 한다.[337] 그는 특히 고대 아테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을 좋아했는데, 그들의 작품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연구와 함께 그리스어를 포함한 그의 새로운 동방 백성을 위한 적절한 고대 그리스 교육의 일부를 형성했다.[329] 그와 그의 군대가 티레 (오늘날 레바논)에 주둔하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장군들에게 운동 경기뿐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의 무대 공연에 대한 심판 역할을 맡겼다.[330] 당시 유명한 배우인 테살루스와 아테노도로스가 이 행사에 출연했다.[331]음악 역시 마케도니아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제국에서 진정한 그리스 도시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아고라, 체육관, 극장, 그리고 그리스 신과 여신에게 바쳐진 종교적 성역과 고대 그리스 신전 외에도 음악당인 오데온이 있다는 것이었다.[332] 이것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뿐만 아니라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아이-하눔과 같은 먼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332]
6. 6. 문학, 교육, 철학 및 후원
마케도니아의 페르디카스 2세는 멜라니피데스, 히포크라테스 등 고대 그리스의 유명 지식인들을 왕실로 초청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를 위해 쓰인 핀다르의 ''찬가''는 그의 궁정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333]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확립했으며, 마케도니아로 이주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정교사가 되었다.[336] 안티고노스 고나타스는 에레트리아 학파의 창시자 에레트리아의 메네데모스,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제논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337]6. 7. 스포츠와 여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는 고대 올림픽 경기의 달리기 종목에 출전을 요청했지만, 처음에는 그리스인만 출전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1세는 고대 아르고스의 테메니드 가문임을 증명하는 족보를 제시하여, 올림픽 ''헬라노디카이''는 그가 그리스 혈통이며 출전 자격이 있음을 인정했다.[342] 기원전 5세기 말, 아르켈라오스 1세는 올림피아와 델포이 (피티아 경기)에서 전차 경주에서 우승하여 올리브 화관을 받았다.[343]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56년 7월 19일 또는 20일에 태어난 바로 그날, 자신의 말이 올림픽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344]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의 제국 전역에서 음악 경연과 육상 경기를 개최했다.[329]6. 8. 음식과 요리
고대 마케도니아는 스트리몬만의 장어와 칼키디케에서 생산된 특별한 와인을 제외하고는 고급 음식이나 음료를 거의 생산하지 못했다.[347] 기원전 3세기경, 고대 마케도니아에서는 고기를 담는 접시로 납작한 빵을 사용했는데, 이는 이후 중세 유럽의 트렌처 빵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347] 소와 염소를 소비했지만, 중세 시대까지 문헌에는 마케도니아 산의 치즈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347]희극 작가 메난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의 식사 습관이 아테네 상류 사회에 침투했다고 기록했는데, 예를 들어 식사 후식 코스에 고기를 도입한 것이 그 예이다.[348] 마케도니아인들은 아테네 요리에 'mattye'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일반적으로 닭고기 또는 다른 향신료, 소금에 절인, 소스를 곁들인 고기로 와인 코스 동안 제공되는 요리였다.[349] 이 요리는 아테네 희극 시인 알렉시스가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1세 시대의 아테네인들의 도덕적 쇠퇴에 대해 쓴 희극에서 조롱을 받았고 방탕함과 음주와 관련되었다.[350]
마케도니아와 더 넓은 그리스 지역의 ''심포지엄''은 귀족과 특권층을 위한 연회였으며, 잔치, 음주, 오락, 때로는 철학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자리였다.[351] 마케도니아 귀족의 주요 구성원인 ''헤타이로이''는 왕과 함께 그러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352] 그들은 또한 사냥감 고기를 얻기 위한 왕의 사냥과 스포츠 활동에 동행해야 했다.[352]
6. 9. 민족 정체성
Μακεδόνες|마케도네스grc에서 유래된 마케도니아( )라는 이름은 "키가 큰, 날씬한"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형용사 μακεδνός(makednós)에서 파생되었다.[10] 이 단어는 도리아인과 관련된 민족의 이름이며 (헤로도토스), 아마도 고대 마케도니아인을 묘사하는 단어일 것이다. 이 이름은 원래 "고지대 사람들", "키가 큰 사람들" 또는 "키가 크게 자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10]고대 저술가들과 현대 학자들은 고대 마케도니아인의 정확한 민족 정체성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지배적인 관점은 마케도니아인이 "진정한 그리스인"이며 그리스 남부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된 생활 방식을 유지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354] 그러나 에른스트 바디안은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 사이의 적대감과 차이점에 대한 거의 모든 현존하는 언급이 로마 제국 시대에 살았던 아리아노스의 저술에 나타나며, 이는 마케도니아인과 다른 그리스인 사이의 민족적 차이에 대한 개념이 이해할 수 없었던 시대라고 지적한다.[355] 기원전 337년 코린트 동맹이 결성된 이후(동맹의 선출된 '헤게몬'인 필리포스 2세가 이끌었고, 그는 동맹의 회원이 아니었음)에 만들어진 정치적 차이만 존재할 뿐, 마케도니아인과 다른 그리스인 사이에 실제적인 민족적 차이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356] N. G. L. 해먼드는 마케도니아의 민족 정체성을 나머지 그리스어 사용 세계와 구별하는 고대의 견해는 도시 국가의 민주주의 체제(예: 아테네)와 군주제(마케도니아 왕국)라는 두 개의 다른 정치 체제 간의 갈등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357]
7. 기술과 공학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 국가들은 비틀림식 공성 무기, 해군 함선, 무기 및 갑옷의 표준화된 설계 개발과 보급에 자금을 지원했다.[371]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에서 볼트를 발사하는 발리스타와 거대한 이동식 공성탑과 같은 공성 무기 개선이 이루어졌다.[372] E. W. 마스덴과 M. Y. 트라이스터는 마케도니아 통치자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와 그의 계승자 데메트리오스 1세가 기원전 4세기 말 헬레니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성 무기를 보유했다고 주장한다.[373]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공성전에서는 거대한 공성 무기를 건설하고 서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장인을 징발해야 했다.[374]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도스 공방전 (기원전 305-304년)을 위해 의뢰한 공성탑은 9층 높이로, 약 399.48m2의 기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 탑은 피벗으로 양방향 조종되는 8개의 바퀴,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철판으로 덮인 세 개의 측면, 다양한 크기의 창문(발리스타 라운드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양모로 채워진 가죽 커튼으로 가려짐)을 통해 화살에서 볼트까지 다양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었다.[375]
기원전 211년 에키누스 공성전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병사들과 사퍼들이 야영지에서 공성 작업으로 이동하는 동안 보호하기 위해 터널을 건설했다. 여기에는 돌을 발사하는 발리스타가 장착된 임시 위커워크 커튼월로 연결된 두 개의 공성탑과 공성추 접근을 보호하기 위한 헛간이 포함되었다.[376] 마케도니아는 공성 기술의 선구자였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저술에서 볼 수 있듯이 투석기 기술 개선의 중심지가 되었다.[374]
공성 무기 및 포병 외에도, 축 회전식 올리브 압착기가 올리브 오일 생산을 위해 고대 마케도니아 또는 그리스의 다른 지역, 레반트, 아나톨리아 등에서 발명되었을 수 있다.[377] 금형 압착 유리는 기원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에서 처음 등장했다(비록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동시에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 세계 최초의 투명하고 반투명한 유리 조각은 마케도니아와 로도스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378]
7. 1. 건축
마케도니아 건축은 다른 그리스 지역과는 다른 형태와 양식을 혼합하여 사용했지만, 고대 그리스 건축과 구별되는 독특하거나 분기된 양식을 나타내지는 않았다.[326] 마케도니아 건축가들은 고전 양식 중 특히 개인 주택의 주랑 현관에서 이오니아식을 선호했다.[366] 펠라, 아이가이 근처 베르기나의 여름 별장, 볼로스 근처 데메트리아스의 왕궁 등 파괴되었지만 몇몇 마케도니아 궁궐 건축 사례가 남아 있다.[366]베르기나에는 대리석 타일 바닥(지붕 타일 잔해로 덮여 있음)이 있는 3개의 대형 연회장 유적이 있는데, 평면 치수는 대략 16.7m x 17.6m이다. 이는 안티고노스 2세 통치 이전이나 헬레니즘 시대 시작 이전일 경우 기념비적인 목재 지붕 트러스의 가장 초기 사례를 보여준다.[367] 후기 마케도니아 건축은 아치와 볼트를 특징으로 했다.[368] 베르기나와 데메트리아스의 궁전은 모두 햇볕에 말린 벽돌로 벽을 만들었고, 후자 궁전에는 왕이나 군사 총독에게 적합한 요새화된 거주지처럼 중앙 안뜰 주변에 4개의 모서리 탑이 있었다.[366]
마케도니아 통치자들은 마케도니아 외부 건축 작품도 후원했다. 필리포스 2세는 카이로네이아 전투 (기원전 338년) 승리 후 올림피아에 필리페이온이라는 둥근 기념 건물을 세웠고, 그 안에 자신과 부모 마케도니아의 아민타스 3세, 마케도니아의 에우리디케 1세, 아내 올림피아스,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묘사한 조각상으로 장식했다.[369]
현재 그리스 마케도니아와 트라키 자치 행정구에는 16개의 야외 극장, 3개의 오데온, 발굴 중인 베리아 극장을 포함하여 약 20개의 그리스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370]
7. 2. 군사 기술 및 공학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리스 국가들은 더욱 강력한 비틀림식 공성 무기, 해군 함선, 그리고 무기와 갑옷의 표준화된 설계 개발과 보급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371]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에서 볼트를 발사하는 발리스타와 거대한 이동식 공성탑과 같은 공성 무기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졌다.[372] E. W. 마스덴과 M. Y. 트라이스터는 마케도니아 통치자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와 그의 계승자 데메트리오스 1세가 기원전 4세기 말 헬레니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성 무기를 보유했다고 주장한다.[373]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공성전은 거대한 공성 무기를 건설하고 서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장인을 징발해야 할 필요성을 야기했다.[374] 데메트리오스 1세가 마케도니아의 로도스 공방전 (기원전 305-304년)을 위해 의뢰하고 3천 명이 넘는 병사가 방어한 공성탑은 9층 높이로 건설되었다.[375] 이 탑은 약 399.48m2의 기단을 가지고 있었고, 피벗으로 양방향으로 조종되는 8개의 바퀴,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철판으로 덮인 세 개의 측면, 화살에서 더 큰 볼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사일 발사를 수용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열리는 다양한 크기의 창문(발리스타 라운드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양모로 채워진 가죽 커튼으로 가려짐)이 있었다.[375]기원전 211년 에키누스 공성전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병사들과 사퍼들이 야영지에서 공성 작업으로 왕복하는 동안 보호하기 위해 터널을 건설했다. 여기에는 돌을 발사하는 발리스타가 장착된 임시 위커워크 커튼월로 연결된 두 개의 공성탑과 공성추의 접근을 보호하기 위한 헛간이 포함되었다.[376] 마케도니아는 공성 기술의 선구자라는 초기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저술에서 알 수 있듯이 투석기 기술 개선의 중심지가 되었다.[374]
7. 3. 기타 혁신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 국가들은 비틀림식 공성 무기, 해군 함선, 무기와 갑옷의 표준화된 설계 개발과 보급에 자금을 지원했다.[371]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에서 볼트를 발사하는 발리스타와 거대한 이동식 공성탑과 같은 공성 무기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졌다.[372]공성 무기 및 포병 외에도 마케도니아에서 기원했을 수 있는 몇 가지 발명품이 있다. 축 회전식 올리브 압착기는 올리브 오일 생산을 위해 고대 마케도니아 또는 그리스의 다른 지역, 혹은 레반트 또는 아나톨리아만큼 동쪽에서 발명되었을 수 있다.[377] 금형 압착 유리는 기원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에서 처음 등장했다(비록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동시에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 세계 최초의 투명하고 반투명한 유리 조각은 마케도니아와 로도스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378]
8. 통화, 재정 및 자원
알렉산드로스 1세 치세에 주조소에서 은화 주조가 왕실 지출을 충당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다.[250] 아르켈라오스 1세는 동전의 은 함량을 늘리고 국내외 상업을 촉진하기 위해 구리 동전도 주조했다.[45] 헬레니즘 시대에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아탈로스 왕조의 왕가는 군대 자금 조달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 독점 형태로 광업 활동을 완전히 통제했다.[381]
9. 유산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치세는 고전 그리스의 종말과 헬레니즘 문명의 탄생을 가져왔다.[392] 알렉산드로스의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정복으로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확산되었으며, 이는 후기 로마의 확장과 비잔틴 제국의 전반적인 토대를 위한 전제 조건 역할을 했다.[394]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대왕)가 왕위를 계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하여 기원전 333년 이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아르벨라·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시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여 페르시아 정복을 이루었다.
페르시아 정복 후에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계속되어 인도 외곽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이러한 세계 제국의 실현으로 그리스 문화와 사상이 널리 퍼져나갔고, 동서 문화 교류와 민족 융합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헬레니즘).
독일 역사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과 헬레니즘 세계의 창조가 로마 시대에 기독교의 성장과 설립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했다.[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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